좋은 사람은 멀리 있어도 종종 생각이 나는 것처럼, 좋은 작품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가슴속에 남는다. 겨울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드라마 도깨비. 하얀 설원에서 코트를 휘날리며 멋지게 악을 소탕할 것 같은 듬직한 남자 공유와 슬픔을 간직한 가녀린 여자 김고은의 호흡만으로도 완벽했던 드라마는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에 회자되고 있다. 드라마 도깨비를 추억하며 월정사 전나무 숲을 찾았다.
글·스타일링. 김효정 사진. 문정일
겨울에도 푸르른 길, 마음을 녹이다
올겨울은 유난히도 춥다. 게다가 코로나까지 겹쳐 몸과 마음이 더 움츠러든다. 그래도 눈이 오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건 많은 이들의 바람. 드라마 <도깨비> 9화에서는 김신(공유)과 지은탁(김고은)의 애절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김신은 숨겨왔던 자신의 속마음을 지은탁에게 고백하고 둘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사진출처 : 네이버TV
"무서워. 너무 무섭다. 그래서 네가 계속 필요하다고 했음 좋겠어. 그것까지 하려고 했음 좋겠어. 그런 허락 같은 핑계가 생겼으면 좋겠어. 그 핑계로 내가 계속 살아있었으면 좋겠어. 너와 같이."
바로 이 장면 속 배경이 월정사 전나무숲이다. 커다란 전나무가 하늘로 길게 뻗은 곳. 눈이 내렸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눈이 오는 날씨는 아니었다. 아쉬운 대로 두 사람이 열연했던 장면을 떠올리며 숲길을 걸어본다. 월정사 일주문부터 금강교까지 1km에 가까운 전나무 숲 길이 펼쳐지는데, 겨울임에도 울창한 나무의 초록빛이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준다.
‘내가 바로 사철나무야’라며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는 건강한 자태가 아름답다. 생각해 보니 겨울에도 잎이 푸르러 작년에 선물용으로 크리스마스 리스를 만들면서 전나무를 사용했던 것 같다. 여러모로 활용도가 높은 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월정사 전나무 숲은 7년 전 템플스테이를 하면서 처음 찾았다. 템플스테이 코스로 아침 산책에 이 전나무 숲을 걷는 게 있었는데, 정말 상쾌했었다. 이번에도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다시 찾은 이곳은 세월의 흐름이 무색할 만큼 그대로였다. 새소리, 바람소리, 시냇물 소리가 삼박자를 이루며 산책하는 이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있었다. 드라마가 아니더라도 마음을 정화시키며 천천히 걷는 이 길 위에서는 모두가 어린 시절 순수했던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길을 걷다 보면 나무에 묶어 둔 팻말에 눈이 간다. ‘걸음마다 온전히 즐길 수 있다. 걸음마다 안정된 느낌을 만끽하며 걸으라.’ ‘나에게 몸이 있음을 알아차린다면 이미 깨달은 것입니다.’ 등 다양한 문구를 적어두었는데, 걷기와 명상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누군가에겐 뻔한 문구지만 다른 이에게는 가슴에 작은 울림을 줄지도 모를 일이다.
산책을 할 때는 그저 ‘나’라는 사람에 집중하면서 잡다한 생각은 접어버리고 내면의 소리에 집중한다. 그러다 자연이 하나 둘 말 걸어오면 어제 만난 친구처럼 대답해 주는 일. 전나무 숲을 걷는 묘미가 아닐까?
걷다가 밑동이 아주 굵은 쓰러진 나무를 발견했다. 이 나무는 수령이 600년 된 나무로 2006년 10월 23일에 쓰러졌다고 한다. 무성한 나무 사이로 쓰러진 이 전나무는 전혀 이질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이것도 자연의 일부라, 마치 한 폭의 그림 같다고 해야 할까. 빛이 잘 들지 않는 곳에는 아직까지 눈이 녹지 않아 흰색 융단을 그대로 덮고 있는 듯하다.
오대산 자연의 품속에 들어선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걸었다면 월정사도 함께 관람해보자. 월정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6·25 한국전쟁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재건했다. 다행히 적광전 앞 팔각구층석탑은 화마를 견뎌내고 그대로 남았다.
팔각구층석탑은 국보 제48호로 우리나라의 유일한 고려 시대 다각 다층탑이다. 하층 기단에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는 데다가 연꽃이 피어오르는 듯한 모습에 우아함이 더해진다. 석탑 귀퉁이마다 달린 80개의 작은 청동 풍경은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탑 앞으로는 두 손을 가슴 위로 가지런히 모으고 공양을 하는 석조보살좌상이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석탑 옆으로는 사람들의 다양한 소망이 담긴 엽서를 매달아 놓았다. 그중 코로나를 이겨내고자 하는 염원이 담긴 문구가 눈에 띈다.
‘겨울은 추워야 제맛’이라는 말처럼 살을 파고드는 추위가 때론 상쾌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조금씩 몸을 움직이다 보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몸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는다. 마치 이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고 봄이 찾아오면, 우리의 소망처럼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릴 것만 같은 기대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도깨비의 여운이 남는다면... 주문진 영진해변
여행에 아쉬움이 남는다면 인근 도깨비 촬영지도 들러보자. 월정 사에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 주문진 영진해변은 김신과 지은탁의 아름다운 영상이 돋보였던 공간이다. 촬영을 갔을 때는 코로나19로 인해 출입이 통제된 상황이었다. 코로나19가 종식되 면 꼭 한번 방문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