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서촌 골목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감성에 젖게 된다. 좁은 골목, 아기자기한 소품가게, 감각적인 카페 그리고 오래된 전통시장까지. 도심 속 힐링 공간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 아닐까. 자유를 억압하던 일제강점기, 천재 작가로 이름을 알리던 이상을 기억하며 서촌의 구석구석을 누비었다.
글. 김민주 사진. 이정수
모더니즘의 대표주자, 이상
서촌의 골목 초입에 들어서면 통유리로 된 운치 있는 한옥, <이상의 집>을 만날 수 있다. 이상의 집은 작가 이상(본명: 김해경)이 세 살 때부터 20여 년간 머물렀던 집터의 일부이다. 그는 아들이 없던 큰 아버지 김연필의 양자로 들어가 이곳에서 성장했으며, 학창 시절부터 문학, 미술, 건축 등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래서 평소 자신이 쓴 문학 작품에 들어갈 삽화를 직접 그릴 뿐만 아니라, 절친한 친구인 박태원 작가의 작품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삽화를 직접 그리기도 했다. 또 그는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의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학과 수석 졸업 후 조선총독부 건축기사로 일하면서 촉망받는 인재로 떠올랐다.
사실 이상이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1933년 ‘결핵’ 판정을 받고 난 이후부터다.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절망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문학 작품을 쓰는 방식으로 스스로에게 처방전을 내렸다. 그러면서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연작시를 발표하게 됐는데 당시 연작으로 시를 발표한다는 것은 매우 획기적이고 드문 행보였다. 하지만 그가 발표한 첫 한글 시 <오감도>는 당시 난해하고 의도가 파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끝내 신문 연재를 중단하기도 했다. 오감도는 ‘까마귀가 하늘을 날며 우리 인간들의 삶을 내려다본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긴장, 불안, 갈등의 분위기를 풍긴다.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상의 집 안에 들어서면 큰 유리창을 통해 외부가 보이는데 가장 먼저 이상의 흉상이 눈에 띈다. 이 흉상은 이상의 친구인 화가 구본웅이 그린 초상화를 바탕으로 최수앙 조각가가 만든 작품이다. 그리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왼쪽 벽면의 위쪽에 빼곡하게 전시된 아카이브, 아래에는 이상의 소설과 수필 등의 지면 작품이 담긴 트레이가 있다. 물론 영인본이긴 하지만 이상 작품의 최초 발표본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이다. 마지막으로 단단해 보이는 회색 문을 열면 서늘하고 어두운 ‘이상의 방’이 나오는데 이곳에 들어서면 그때 그 시절 그가 느꼈던 쓸쓸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끝으로 이상을 떠올리면 빼놓을 수 없는 작품, <날개>의 최초 발표본은 감상해보자. 먼저 작품을 보면 제목이 ‘개날’이라고 적혀있는 걸 알 수 있는데, 그 당시 맞춤법 통일안이 개정되었지만 인쇄물에 영향이 미치는 데에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음을 알 수 있다. 또 그가 그린 삽화에는 밖으로 쏟아져 나온 알약과 약의 포장용기가 그려져 있는데, 이상은 독자들에게 퀴즈를 내듯이 여섯 개의 알약에 알파벳 대문자를 적어놓았다. 이 알파벳을 조합해 보면 바로 ‘SANG RI’, 이상 본인을 뜻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왜 그는 자신의 성을 LEE가 아니고 RI로 표현했을까. 이상은 포장용기에 6개의 알약만 넣을 수 있어서 자신의 영문 성 파닉스를 변형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상은 평소에도 이런식의 언어유희를 즐겼으며, 글자를 꾸미는 일에도 능했다. 현재까지도 많은 디자이너들이 이상을 우리나라 최초의 타이포그래퍼라고 칭하기도 한다.
예스러움이 가득한 대오서점과 통인시장
이상의 집을 관람한 후에는 고즈넉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서촌의 구석구석을 느껴도 좋다. 책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헌책방, 대오서점은 필수 코스다. 대오서점은 조대식, 권오남 부부가 1951년에 개점한 헌책방으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다. 처음에는 한옥의 창고를 개조해 만들었는데 서점을 찾는 사람이 많아지자 창고 밖의 한옥 내부에도 책장을 두어 책을 진열하면서 운영해 왔다. 현재는 헌책방 외관을 유지한 채 카페를 함께 운영 중이며 수첩, 엽서 등 서점과 관련된 굿즈를 판매하고 있다.
여행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것은 바로 음식! 대오서점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다 보면 서촌의 재래시장인 통인시장이 보인다. 고소한 기름 떡볶이, 직접 짠 자몽주스, 효자동 닭꼬치, 효자베이커리 등 다양한 종류의 맛집이 존재하니,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가 먹고 싶은 음식을 하나씩 맛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허기를 달래면서 이색적인 체험도 하고 싶다면 통인시장의 엽전도시락을 이용해도 좋다. 시장 안에서 엽전을 구입한 뒤, 시장 안의 가맹점에서 엽전을 내고 음식을 구입해 도시락을 채우는 데, 입맛 따라 먹고 싶은 음식을 골라 담으면 된다.
우리는 모든 것이 빠르고 편리한 스마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가끔은 불편하고 느리던 그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과거를 향해 시간 여행을 하고 싶을 때 서촌의 골목길을 정처 없이 천천히 느릿느릿 걸어보자. 지쳤던 일상에 위로가 되어주고 당신의 감성을 충전시켜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