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소년과 도시소녀의 순수한 사랑이야기를 담은 소설 <소나기>. <소나기>가 오랜 시간 동안 '국민소설'로 회자될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첫사랑의 기억을 상기시켜 독자에게 공감을 자아냈기 때문이 아닐까. 그때 그 시절, 우리를 울고 웃게 했던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며,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로 향했다.
글. 김민주 사진. 이정수
소년과 소녀가 만난 그 곳
학창시절, 이해하기 힘들고 어렵게만 느껴졌던 한국문학이 달리 보이던 순간이 있었다. 바로 황순원 선생의 작품 <소나기>를 만나고 나서부터다. 그저 활자를 읽었을 뿐인데 소년을 두고 떠난 병약한 소녀에게 왜 이리 감정이입이 됐던 건지, 한동안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그 가슴 시린 여운이 오래도록 남아 있곤 했다.
3월의 어느 날, 나는 <소나기> 속 소년과 소녀처럼 순수했던 그 시절을 추억하며 양평군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을 찾았다. 황순원문학촌은 20세기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황순원 선생의 대표작 <소나기>를 재현한 문학공간이며, 선생의 문학과 생에 전반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또한 수숫단 모양으로 된 문학관 지붕, 소나기가 내리는 광장, 비를 피할 원두막 등 소설의 배경을 실감나게 재현해 관람객의 눈길을 끌고 있다.
황순원문학촌은 2000년 9월 14일 황순원 선생이 타계하자, 그의 문인 제자들과 교수들이 선생님의 문학을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소설 속 무대가 된 양평군가 협의하여 이곳에 설립하였다. <소나기>를 읽다보면 소설 끝부분에 소년과 소녀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 작품 배경이 ‘양평’임을 알 수 있는 구절이 나온다. 게다가 북녘을 고향으로 둔 황순원 선생은 양평을 “유년의 내 고향을 빼닮았다”라며 각별히 아끼셨고, 살아생전 황순원문학촌 가까이에 있는 개울가와 양평의 여러 산과 들을 들리셨다고 한다.
개울물은 날로 여물어 갔다. 소년은 갈림길에서 아래쪽으로 가 보았다. 갈밭머리에서 바라보는 서당골 마을은 쪽빛 하늘 아래 한결 가까워 보였다.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 거기 가서는 조그마한 가겟방을 보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소년은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 호두알을 만지작거리며, 한 손으로 수없이 갈꽃을 휘어 꺽고 있었다.
- 소설 <소나기>에서
격동의 시기, 한 줄기 빛이 되다
황순원문학촌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황순원 홀이 눈에 띈다. 황순원 홀은 원뿔 모양으로 수숫단을 형상하였고, 작가의 친필 이미지로 만들어진 조형물이 있으며, 벽면에는 황순원 선생의 생애와 작품 연보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물론 황순원 선생에 대해 깊이 알고 싶다면 제1전시실은 꼭 들어가 보는 것을 추천한다. 제1전시실에는 황순원 선생의 집필 공간이 그대로 재현돼 있으며 선생께서 직접 쓰신 유품도 만날 수 있다.
황순원 선생의 부친 황찬영 선생은 3·1운동 때 평양에서 교사로 있었으며, 평양 시내 태극기 배포 책임자로 투옥된 독립유공자이다. 황순원 선생 역시 이러한 부친의 영향으로 인해 일본어만 강요하던 험난한 일제 강점기 시대에서도 우리말을 지키려는 비장한 각오로 글쓰기를 시작했다. 또 그는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집>, <술 이야기>, <카인의 후예>, <곡예사> 등을 쓰면서 격동의 시대를 보냈던 인물들의 삶을 그려내 대한민국 문단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황순원 선생은 현실을 외면하거나 초월하려는 예술지상주의가 아닌, 오직 ‘순수와 절제의 미학’으로 시대가 부여한 문제를 주체적으로 떠안고 고민하는 문학을 보여줬다. 실제로 선생이 배출한 많은 문인 제자들은 그를 ‘타인에게 한없이 관대하고 스스로에게는 한없이 엄격한 스승’으로 칭할 정도로 문학에서만큼은 완벽성을 지향했다.
제자들에겐 존경스러운 스승으로, 독자들에겐 감동과 희망을 준 소설가로서 우리 마음속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는 황순원 선생. 70년 문학인생 동안 발표한 수많은 문학 작품을 읽으며, 우리는 마음의 위로를 얻고, 어두웠던 그 시절 역사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인의 서정을 깨운 순수 문학의 대표 작가, 황순원 선생의 발자취를 느끼고 싶다면 양평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로 향해보자.
오래된 공간에서의 시간여행
황순원 문학촌을 방문하고 서울로 올라가기 전, 출출함을 달래기 위해 양평 두물머리 근처 카페를 찾았다. 스콘과 크루아상을 먹으면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하고, 통 유리창 넘어 보이는 북한강을 바라보니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다. 요즘 부쩍 빌딩 숲에서 벗어나 확 트인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었는데, 양평은 서울과 거리도 가까워서 멀리 가지 않고도 도심 밖 자연을 만끽하기 좋은 곳이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완연한 봄이 왔다. 제아무리 집순이, 집돌이라 하더라도 봄의 계절만큼은 꽃구경이던 피크닉이던 온갖 명분을 앞세워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게 만든다. 잠시 답답한 도심에서 벗어나 충전을 하고 싶을 때, 가까운 곳이라도 좋으니 일단 어디론가 떠나보자. 봄의 계절이 시작된 3월은 당신의 몸과 마음을 깨워줄 좋은 시기이다.